'Noto Sans KR';
조각의 역사는 재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시시대를 지나 문명이 시작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돌과 나무, 나아가 여러 금속들이 조각의 재료가 되었다.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조각은 또 다른 창조의 영역을 열게 된다.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발표한 <샘>처럼 공장의 물건 중 하나인 남성 소변기가 조각이 된 적도 있었으며 미국 미니멀리즘 조각가 댄 플래빈(Dan Flavin)의 작품처럼 형광등이 작가의 선택에 의해 ‘오브제’로 정의 내려지며 변형되고 창조되기도 했다.
하지만 3D 프린팅의 경우에는 사물을 오브제로 명명하거나 새로운 재료를 발견해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술가가 3D 프린팅을 사용할지의 여부가 제작 과정의 가장 앞 단계에서 조형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조형 예술계에서 언급하는 ‘발견’과 ‘명명’과는 차원이 다른 혁명인 것이다.
현재 많은 예술가들은 3D 프린팅을 자신의 조각 작품 모델링에 활용하거나, 작업 과정에 또 다른 대안으로써 활용하고 있다. 설치 예술가 ‘황란’은 디올과 ‘레이디 디올’ 아티스트백 협업을 하면서, 핀(작은 못의 형태)을 박는 작업 과정이 가방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레이디 디올 백을 3D 프린팅한 후 그 위에 설치를 진행했다. 이 작업 과정에서 3D 프린팅은 작가에게 실물 그대로의 물건을 재현해 줌으로써 리스크 없이 새로운 조각에 도전할 수 있는 입구의 역할을 해준 셈이다.
‘애플 세대의 예술가!’ 시각 아티스트 오스틴 리(Austin Lee)에 대한 수식이다. 트렌드를 이끄는 동시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애플’이란 표현이 사용됐지만 필자는 그 문구를 ‘3D 프린팅 시대의 예술가 오스틴 리’로 바꾸고 싶다. 오스틴 리는 대부분의 조각을 애플 컴퓨터와 아이패드를 활용하며, 3D 프린팅으로 제작한다. 어떤 작품은 덩어리 별로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이기도 하고, 프린터로 거푸집을 만든 다음 청동 재료를 부어 굳히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3D 프린팅으로 만든 조각을 다시 채색하기도 한다. 이런 융합적인 방식은 오스틴 리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과연 이 조각의 재료는 무엇이고, 어떤 과정으로 만들었지?’라는 호기심을 던진다.
“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최선을 섞으려고 노력한다.
이유는 둘 다 다른 방식으로
좋은 작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스틴 리 인터뷰 中
즉 오스틴 리에게 3D 프린팅으로 조각 작업을 하는 것은 디지털 방식인 동시에 아날로그이며, 새로운 시각 언어를 만들어 내는 장치인 것이다. 그에게 3D 프린팅은 조각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또 다른 출구같은 존재다.
오스틴 리 : 패싱 타임
서울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오슨틴 리 전시에는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회화, 조각, 영상뿐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을 실현시킨 신작 50여 점을 한자 리에 소개한다.
전시 기간: 2023.09.26.(화) ~ 2023.12.31.(일)
시간 : 10:30 ~ 19:00
장소: 롯데뮤지엄
또 한 명의 3D 프린팅 작가로는 소리를 시각화하는 질 아자로(GillesAzzaro)를 들 수 있다. 개인이 가진 목소리의 톤과 음량의 높낮이가 조형화되면서 질 아자로의 작품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프랑스의 디지털 아티스트인 질 아자로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의 2013년 연설 내용을 3D 프린팅을 통해 입체 조각으로 구현했다. 39초간 이어진 오바마의 연설 목소리를 시각화한 것이다. 3D 프린팅 기술을 차세대 제조업 혁명의 대표 주자로 거론한 당시 연설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한 아트 퍼포먼스였다. 그는 이외에도 아이의 첫 울음소리로 탄생의 경이로움을 시각화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사랑은 답이다’란 메시지를 담아 긍정의 이미지를 3D 프린팅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통해 3D 프린팅이 소리뿐 아니라 향과 같은 후각이나 진동과 같은 촉각적 분야에도 결합될 수 있는 흥미로운 기술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는 3D 프린팅으로 만든 조각이 어떻게 가치가 있느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사회와 산업이 발전하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도구들 덕분에 미술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되고 발전해 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같은 카메라를 가지고도 수없이 많은 예술적 사진을 만들어 내듯 같은 3D 프린터를 가지고도 예술가가 어떻게 이해하고, 탐구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광범위하고도 창의적인 예술의 세계가 열릴 수 있는 것이다.
3D 프린팅은 예술가들을 위험한 작업 과정으로부터 보다 안전하게 지켜 주기도 한다. 석조, 목조, 그 외 유리 조각 등 수많은 재료들이 조각 작품이 되는 공정에서 사고를 발생시켜 왔고 먼지나 가루 날림 등으로 인해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켜 왔는데 3D 프린팅으로 어떠한 과정을 대체한다면 상당수 사고로부터 안전해진다.
나아가 지금 시대의 3D 프린팅은 표면 처리에 있어서도 질감을 정밀하게 구현하고 있어 공예가의 경우 공예품 제작에 필요한 섬세함과 정교함, 끈기와 인내력의 한계가 3D 프린팅이 지닌 기술적 장점으로 해결될 수 있다.
처음 유화 물감이 발명되었을 때 많은 화가들이 유화 물감의 사용법을 연구하고 터득하는데 전 생애를 바쳤듯이 3D 프린팅 역시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새롭게 탄생한 도구로서 본인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구현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미술의 역사가 ‘손’과 ‘노동’이라는 가치에서 ‘개념’과 ‘새로운 재료’로 변화되었듯이 3D 프린팅은 ‘본적 없는 새로운 예술’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적 도구로서 건강하게 이해하고 잘 활용해야 하는 필수적 존재가 될 것이다.